계획대로라면 오늘 제가 가운을 입어야 합니다. 9월도 되었고 또 오늘이 한 달에 한 번 성찬식을 하는 날이니 가운을 입기에 적당한 날입니다. 그러나 오랜 생각 끝에 오늘은 가운을 입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여러분께 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대해 설명 드리고 싶습니다.
성직자 가운은-적어도 제가 알기로는-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시작된 것입니다. 예배를 인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성직자이지만 그도 몸을 가진 한 인간입니다. 큰 천으로 자신의 몸을 가림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유한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약함과 부끄러움을 감추려 한 것이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성직자가 입는 가운엔 부끄러움을 "가린다"는 약해지고 자신이 목사임을 "드러낸다"가 더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부끄러운 몸을 가리는 단순한 천이었던 가운에 스타일이 더해졌고 목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색깔과 상징들이 더해지면서 가운은 더 이상 "가리는 옷"이 아닌 "드러내는 옷"이 되어버렸습니다. 가운 안쪽보다 바깥쪽에 더 무게가 실리게 된 것이죠.
가운을 입지 않겠다는 저의 결정엔 저를 목사 되게 하는 것이 제가 입은 옷이 아닌 제 안에 담긴 예수님의 은혜라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운 것으로 치자면 저는 가운을 열 개 입어도 가려질 수 없는 큰 죄인입니다. 아무리 겹겹이 가운을 입는다 해도 저의 말과 행동이 결국 저의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말 것이니 두꺼운 가운으로 가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또한 제 가운 위에 아무리 거룩해 보이는 장식을 단다고 해도 그것이 저를 목사 되게 하지 못하니 그도 또한 아무 소용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차라리 입지 않는 편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용감하게 결정은 했지만 너무 단번에 수천 년 내려오던 교회 전통을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또 가운을 입지 않으면서 혼자만 옳은 척도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꾀를 내어 타협점을 찾았습니다: 평소에는 가운을 입지 않겠지만 성찬식이나 세례식, 그리고 장례식과 같은 교회의 몇몇 중요한 예식에서는 "예를 갖추어 입는 옷으로서의" 가운을 입겠습니다. 제가 입는 가운은 정성스런 예배에 정성스레 참여한다는 의미로서 가운입니다. 저를 가린다거나 드러내는 옷으로서는 입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왜 입지 않았느냐고요? 오늘 가운을 입었으면 제가 가운 위에 기타를 매야 합니다. 할 수야 있었고 또 내심 한번 그렇게도 해보고도 싶었지만 검은색 가운 위에 둘러맨 기타가 아무래도 이상할 것 같아서 오늘은 가운을 입지 않았습니다.^^ 우리 예배를 위해 찬양을 인도해줄 좋은 찬양 사역자를 찾으면 그 때는 꼭 성찬식 때 가운을 입도록 하겠습니다.
그냥 입으면 될 것을 괜히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 느끼셨다면 뭣 하나 쉽게 하지 못하는 젊은 목사를 이해해주시리라 믿고 깊이 감사 드립니다. ^^
글쓴이: 한명선 목사, 요벨한인연합감리교회 NJ
올린날: 2013년 9월 3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