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기본틀 두가지로 '바른 가르침'(ortho-dox)과 '바른 실천'(ortho-proxis)을 말합니다. '바른 가르침'이란 '어떻게 믿느냐?'의 문제이고, '바른 실천'이란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바른 가르침에 근거한 바른 삶의 실천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믿음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지만 바른 삶의 실천이 없다는 것이 많이 지적됩니다. 성경공부도 많이 하고 예배도 잘 드린다고 하지만 '크리스천 인격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옛날 칼 막스는 "종교는 대중의 아편이다"(Religion is the opiate of the masses)라고 비판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종교가 생각하지 못하는 대중, 의식화되지 못한 군중의 무지함을 조장한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러시아 볼쉐비키 공산혁명이 일어날 때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은 "바늘위에 천사가 몇이나 앉을 수 있는가?"라는 시시한 질문을 가지고 심오하게 신학 토론을 벌이기도 했고, 천하가 바뀌는데 예배 때 어떤 장식이 교리적으로 합당한 것인지 피터지게 다투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일반 평신도들에게는 간단한 교리문답 정도만 가르치고 성경을 깊게 공부하는 일은 금지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막스같은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종교는 대중을 무지하게 만드는 집단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릭 워렌 목사도 "1차 종교개혁은 믿음(belief)의 개혁이었다면 앞으로 필요한 개혁은 행동(behavior)의 개혁이 필요하다."라고 했습니다. 동의합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보면 '바른 실천'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자기가 남들보다 교리적으로 잘 믿는다거나 성경적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믿음이나 교리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신앙생활을 어떤 교리의 명제를 자기가 알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마는 문제입니다. 성경 욥기에 나오는 욥의 친구들이 보여준 그런 문제입니다. 자기 신앙 잘난체에 바쁘고 헛된 폼잡는 영적인 교만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말하기를 "교회는 죄인들이 병고침을 받는 병원과 같은 곳이지 성자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세상에서 잘난 것 자랑하느라 바쁜 사람들도 문제이지만, 거꾸로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헛된 명예를 교회에 와서 이루려고 하는 웃지 못할 슬픈 코미디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들'(forgiven sinners)입니다. 그런데 예수 십자가 은혜로 용서받은 죄인들이 서로 자기들이 얼마나 거룩한 존재인지 도토리 키재기 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노릇인지 모릅니다.
신앙성숙은 내 안에 내가 죽고 예수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매일 죽노라."했습니다. 어제 목회스텝회의에서 주중에 고등학교 캠퍼스를 방문하는 전도사에게 "가서 뭐하는가?"라고 물었더니 "Nothing. I just sit there with them."(아무것도 안합니다. 그냥 학생들과 같이 있습니다.)라고 답을 합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정말 아무것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이 있는 그 자리에 함께 있어준다(presence)는 것입니다. 노자가 말하는 'non-doing'입니다. '하지 않음으로 함'입니다. 성경 시편을 생각해 보면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서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사람이 자기가 뭘 하려고 분주하면 하나님은 그 자리에 계시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좀 사람다워야 좋습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에게 더 가까운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 본인만 모르지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 합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자기 자리를 지켜야 보기도 좋고 그래야 하나님이 들어오실 공간이 가능하게 됩니다. 어떤 교인이 어떤 사람 꼴보기 싫어서 교회 오기 싫다고 하면서 한마디 합니다. "그 사람 저를 보면 항상 어색한 천사의 미소를 하고 자기는 인생 모든 문제를 다 신앙적으로 해결한 사람처럼 말하면서, 무슨 일에나 기도하면 다 된다고 믿으면 다 된다고 쉽게 말하는데 그 사람 만나고 나면 하루 종일 기분 나쁩니다." 교회만 오면 어색한 거룩한 얼굴과 목소리 해야 되는 부담을 가지지 말아야 서로 좋습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자기 신앙 잘난체에 바쁜 사람들이 성경공부모임이나 셀에 있으면 재미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 너무 불편하게 만듭니다. 옛날 성프란체스코는 말을 하지 않고 하는 설교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삶으로 설교하자고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말로 설교를 많이 해야 하는 저같은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많이 민망하고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잘 믿고 믿는만큼 살려고 노력은 해야 합니다. 남들이 다 아는 옛날 이야기를 고집스럽게 많이 말하는 것이 보수신앙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자기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이상적인 세상에 대해 많이 말하는 것도 진보신앙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냥 말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예수님 가르침을 바로 아는 것이 'orthodox', 진정한 보수입니다. 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orthopraxis'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진보입니다. 보수라고 하면 예수님의 그것을 끝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진보라고 하면 예수님의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글쓴이: 김정호 목사, 아틀란타한인교회 GA
올린날: 2012년 10월 15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