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노래’로 여호와를 노래하라!

지난 주일 예배, 찬송가 “내 평생에 가는 길”을 부를 때였습니다. 4절의 후렴 전 마지막 가사가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나의 영혼은 겁 없으리.” 예전에 쓰던 찬송가에는 이 부분이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로 되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없겠네”로 불러오던 것을 새 찬송가가 “없으리”로 바꾼 것입니다. ‘겁’ 자를 부르며 순간 고민이 들었습니다. 이것을 ‘없으리’로 불러야 할지 아니면 ‘없겠네’로 불러야 할지.

다른 찬송인 410장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도 이렇게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2절, 옛 찬송가에 “주 십자가에 달리사”로 되어 있던 것이 “주 십자가 지심으로”로, 3절 “나 주께 영광 돌릴 때 이 평화 충만하도다”는 “나 주님께 영광 돌려 참 평화가 넘치도다”로 바뀌었습니다. 모두 함께 부르는 찬양이니 쓰여져 있는 대로 불러야 하겠죠. 하지만 옛 찬송가에 길들여진 입에 새 찬송가의 바뀐 부분이 당최 따라 붙질 않습니다.

왜 바꾸어야 했을까? 선뜻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겠네”를 “으리”로 바꾸는 것이 과연 어떤 신학적인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것일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라고 말하는 것과 “십자가를 지셨다”라고 말하는 것엔 과연 어떤 다른 점이 있을까? 과연 그렇게 바꾸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변화를 거부하고 과거에 집착하는 태도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새로운 성경 번역본이 나올 때마다 사탄의 번역이니, 하나님 말씀을 오염시켰느니 하며 자신에게 ‘편리하고 익숙한 것’만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의미 없는 변화로 혼란만 초래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새로운 찬송가가 필요한 이유는 현대인들이 그들의 문화적 언어를 가지고 하나님을 조금 더 가깝게, 혹은 더 깊게 찬양토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찬송가가 가져와야 할 변화는 조금 근본적이고 신학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없겠네”를 “없으리”로, “달리사”를 “지심으로”로 고쳐서 이미 “없겠네,” “달리사”로도 충분히 이뤄지는 신학적 소통에 불필요한 걸림돌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지는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시 96:1a)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가 “새 노래”라고 썼던 것은 새로운 마음으로 찬양하라는 말 이외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의 은혜로 항상 처음 찬양하는 것처럼 찬양하라는 말입니다. “없겠네”든 “없으리”든 항상 변치 않으시는 주님, 늘 ‘새롭게’ 찬양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