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있다. 바다에서 가장 무서운 육식동물로 알려진 범고래가 어떻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면 높이 뛰어오르는 묘기를 보여주게 되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칭찬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오직 칭찬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책망과 비난을 하지 말고 (그냥 모른 체 하고) 잘했을 때 칭찬하고 격려하면 훨씬 효과적으로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분명히 칭찬은 사람을 세우고 조직을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칭찬은 정말 탁월한 가치를 지닌 덕목이다. 그런데 이 칭찬이란 것이 "무조건" 칭찬일 경우에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을 우리가 경험으로 안다. 어떤 칭찬은 당장에는 좋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득보다 해가 되는데, 칭찬의 도를 넘어서 아첨이 되는 경우가 그렇다. 목적이 상대방의 유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나 자신에게 있을 때 칭찬이 아니라 아첨이 된다. 격려의 말, 잘한다는 말을 해줌으로써 그 사람이 이 말을 듣고 힘을 얻어 하는 일을 더 잘하게 하려는 선한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을 해줌으로써 내가 장차 그 사람으로부터 무언가 반대급부를 얻고자 하는 의도로 칭찬하거나, 아니면 그 사람이 나의 사탕발림으로 제대로 현실판단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사람을 결국 파멸시키고자 하는 아주 사악한 의도가 있는 경우 이것은 칭찬이 아니라 아첨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칭찬과 아첨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칭찬의 형태를 보고 그것을 무조건 좋은 덕목으로 여기지 말고, 칭찬의 의도가 무엇인가에 따라 가치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건전한 비판과 불건전한 비판을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건전한 비판은 듣는 사람을 세우기 위한 목적이 있지만 불건전한 비판 듣는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한 파멸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7:1-2절에서 예수님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했을 때, 그 의미는 남을 무너뜨리기 위한 비판, 즉 비난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을 뭐라고 부르셨는가?
회칠한 무덤,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 외식하는 자, 마귀의 자식, 독사의 자식 등 너무나 신랄한 비판을 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비판의 문제에 대하여 일관성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의 목적은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여 결국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두 비판의 경우는 형태는 비슷하지만 성격은 너무나 다른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말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기준은 그것이 비판인가 칭찬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것이든 남을 세우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남을 무너뜨리려는 목적이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남을 무너뜨리려는 목적으로 말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칭찬이든지 비판이든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가 남을 세우기 위해 말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비판이든 칭찬이든 좋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외형적인 말의 형태, 즉 그것이 칭찬이냐 비판이냐에 너무 신경쓰지 말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사람을 세우는 목적으로 사용되느냐 아니면 사람을 무너뜨리는 목적으로 사용되느냐에 신경써서 오직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살리는 말만 해야 할 것이다.
글쓴이: 홍삼열 목사, 산타클라라한인연합감리교회 CA
올린날: 2012년 10월 11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