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잔치의 흥이 한풀 꺾이고, 본격적으로 초록의 계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창 밖을 내다보다 문득 '꽃도 한때요, 잎도 한때'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좀 궁상맞은 듯한 그 생각의 끝에 '뿌리'라는 낱말이 마음에 쿵 와 닿습니다. 꽃도 지고 잎도 지지만, 뿌리가 온전하다면, 그 나무는 또다시 찬란한 시절을 맞을 것입니다.
나무의 생명력은 겉으로 드러난 곳에 있지 않습니다. 비록 땅 속에 숨어 있어 사람의 주목을 받진 못하지만, 뿌리야말로 나무를 살아있게 만드는 장본인이죠. 꽃이 딸이고, 잎이 아들이라면, 뿌리는 딸 아들 키워내는 어머니의 젓 줄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뿌리를 소홀히 여긴다면, 그 나무는 더 이상 화려한 꽃 잔치도, 초록의 향연도 펼치지 못할 것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뿌리가 튼튼해야 합니다. 뿌리만 살아있으면 내일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곳에만 온통 마음을 빼앗깁니다. 내면보다는 외모에, 내적 성숙보다는 외적 성장과 성과에, 인격보다는 성공하는 능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뒤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거든 사람들보다는 화면에서 빛나는 한 사람의 주인공에 모든 찬사가 돌아갑니다. 말로는 "모두 함께 일궈냈다"고 하지만, 그 성취의 대가는 눈에 제일 띄는 한 사람이 독차지합니다.
몇 주 전에 아내와 영화를 봤습니다.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유독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영화가 다 끝난 후에 검은 화면에 수없이 올라오는 '수고한 사람들' '도와주신 분들'의 명단이었습니다. 영화가 한 편의 인생이라는 말은 그 영화의 스토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알아주는 것은 스크린에 화려하게 등장한 주연과 조연뿐, 보조 출연자(소위 엑스트라)들과 수많은 스텝들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무'에 가깝다는 점 또한 영화와 인생의 공통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뿌리가 줄기를 살리고, 뿌리 덕에 잎도 피고 꽃도 피지만, 뿌리는 잎과 꽃이 받는 영광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땅속 제자리를 지키며 부지런히 일합니다. 오직 삶의 터전인 대지만이 뿌리의 존재를 알고 인정합니다. 멋지게 하늘 높이 솟구치기보다는 묵묵히 땅속 깊이 자리매김하는 뿌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당장 꽃이 찬란하고 잎이 무성하지 않아도, 온갖 비바람 견디며 누구보다 더 오래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뿌리 깊은 나무가 되고 싶습니다.
글쓴이: 이현호 목사, 새빛교회 VA
올린날: 2013년 5월 22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