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자가 귀한 시절, 아이들은 손가락 두세 마디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연필 도막을 볼펜 자루 뒤에 꽂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다 닳아 없어진 모양을 본 떠서 몽당연필이라고 불렀던 추억의 학용품입니다. 쓰다 보면 정도 가고, 나중에는 오히려 경쟁하듯 몽당연필을 더 많이 갖고 싶어하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요즘은 몽당연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이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껴서 오래도록 사용하는 것이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 궁상맞고 구차하게까지 보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잣대가 그만큼 많이 변했다는 증거입니다.
헌데 이 몽당연필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극빈자들과 병약자들을 위해 온 생애를 헌신한 마더 테레사입니다. 체구조차 150cm를 겨우 넘긴 작은 육신의 테레사 수녀는 스스로를 표현할 때도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라고 낮추어 겸손히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보잘것없지만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여 살겠다는 굳은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서로를 짓밟고서라도 자신을 가장 높은 곳에 올리려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몽당연필처럼 더 큰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려는 테레사 수녀의 모습은 진정 그 무엇보다 큰 성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와 관련되어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테레사 수녀가 한 힌두교인의 집에 곡식 한 바가지를 들고 찾아갔습니다. 그 가족은 제대로 먹지 못해 당장 무엇이든 먹지 않으면 곧 죽을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힌두교 가정은 테레사 수녀가 가져온 곡식의 반만 챙기고 나머지는 테레사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머지 반은 자신들처럼 굶고 있을 이웃집과 나누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나누어 먹겠다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정작 깊은 감동을 받은 이는 테레사 수녀였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자신이 그들을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다는 생각을 그 때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테레사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몽당연필이라 비유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조건을 갖추어 완벽한 모습이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일에는 높고 낮음도, 크고 작음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몽당연필조차 함께 쓰겠다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이면 그만인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풍요함 속에서도 더 많이 가지려고만 하는 우리 시대가 잃어 버린 모습이 이런 나눔의 마음이 아닐까요? 어쩌면 작은 것 하나도 함께 나누어 가져야 할 하나님의 몽당연필로 부름 받은 오늘날 교회가 잊고 지내는 가르침이 이런 낮고 낮은 모습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풍요한 오늘을 살면서 문득 지나간 시절 몽당연필을 아끼며 작은 소망을 꾸었던 순간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 보시지 않으십니까? 지금 잊고 지내던 그 시절의 몽당연필처럼 살 수 있는 기회가 여러분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제 선택은 여러분 몫입니다.
글쓴이: 권혁인 목사, 버클리한인연합감리교회 CA
올린날: 2013년 8월 15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