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까치발 할 수 있어요

얼마 전 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8m 깊이 맨홀에 빠진 초등학생 남매가 1 시간 20여분 만에 구출되었다는 기사입니다. 내용인즉, 저녁 7시쯤 서울 강북구 송중동의 체류지 펌프장 내 화단에서 11살배기 누나와 10살배기 남동생이 8미터나 되는 맨홀 주변에서 놀다가 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구조에 참여한 소방대원은 위급했던 상황을 표현하기를 "누나 허양은 턱 밑까지 물이 차 있던 위급한 상황에서 까치발을 한 상태로 동생을 안고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맨홀 깊이에는 1.2 m의 물이 이미 차 있었는데, 키가 1.1m 밖에 되지 않는 동생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누나가 까치발로 한 시간 이상을 버텨 동생을 익사 위기에서 구해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남매는 가벼운 찰과상과 저 체온 증세를 보였지만, 감사하게도 인근 병원에 옮겨져 간단한 치료를 받은 뒤 바로 퇴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훈훈한 이야기입니다. 누나라고는 하지만 11살짜리 어린아이입니다. 자기 키의 거의 10배나 되는 수렁에 빠졌다면 무서웠을 텐데, 그 와중에도 자기 동생을 끌어 안고 물에 빠지지 않게 까치발로 1시간 20분을 버텼다니 말입니다. '어쩜 요즘 이런 일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끊임없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전해 듣는 부패, 싸움, 사기 등의 어두운 소식들이 난무하던 차에 들려진 마른 땅의 단비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 단비의 중심에는 까치발이 있었습니다. 어린 여아의 행동을 보니, 동생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 발을 땅에서 떼어 높이를 조금 높였던 것입니다. 동생의 키가 물보다 높아지려면, 끌어 안고도 자기 머리 이상으로 숨을 쉬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날 이와 같은 이야기가 훈훈하게 들려지는 이유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해서 까치발을 들어 줄 주 아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까치발을 든다는 것은 추가적인 애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추가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힘과 시간, 에너지도 부족한 판에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이라는 것은 생각하기 쉽지 않습니다. 자기도 생존해야 하는 와중에 11살의 어린이는 자기가 살고자 하는 열망보다 최선을 다해서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까치발을 들며 서바이벌을 위한 최소 에너지 이상의 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후 자기 목숨을 지키는 데에 해가 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오늘날 누가 과연 자기가 아닌 남을 위해서 애를 쓸까? 자기 살기에도 에너지를 아끼려 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상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세상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아직 밝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더 감사했습니다. 까치발은 작은 높이의 차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높이는 생명을 살리는 높이였습니다.

언젠가 크리스천 연예인 차인표가 TV 토크쇼에 출현해서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Compassion 구호 단체를 알렸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차인표는 하나의 예화를 들었습니다. 여러 어린 친구들이 함께 즐겁게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한 친구가 그만 하수구에 빠졌습니다. 그 친구는 어두운 곳에 떨어져 퀴퀴한 냄새가 나는 오물에 뒤엉켜 버렸습니다. 그 아이는 그곳에서 소리를 지르지 못했습니다. 다급하기도 했을 것이고, 여건도 좋지 않았습니다. 혹 소리를 질렀다 해도 하수구 속에서 지르는 목소리는 밖에까지 잘 전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밖에서 아이들이 울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함께 놀던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퍼져 나갔고, 이내 주변에 있던 어른들이 듣고 몰려 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하수구에 빠진 아이를 발견하고 구조작업을 시작합니다. 그 아이는 구출되었습니다.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까요? 어른들의 힘도 있었지만, 그 보다 먼저 그 어른들을 불러오게 만들었던 어린 친구들의 울음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차인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담겨 있는 일종의 패배주의와 회의적인 생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나는 능력이 없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조건이 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저 할 수 있는 바를 한 번 해 보라고 말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구출할 힘은 없었지만, 울 수 있는 힘은 있었습니다. 자기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에 우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 친구를 위한 울음은 그 친구를 살렸던 것입니다.

요즘은 성경을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결단코 개인적인 부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믿음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고백이지만, 그 고백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늘어만 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도 누군가에게 잘못이 있을 때, 연대적으로 책임을 지게 하시는 모습도 발견합니다. 아간의 잘못을 통해서 온 이스라엘이 전쟁을 실패하기도 하고, 다윗의 교만 때문에 예루살렘의 1/3이 죽기도 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나'를 만나 주실 때에, 나 한 사람만 좋은 신앙이 되었다고 기뻐하시지 않으시고, 가정의 아빠로서의 '나', 직장의 한 일원으로서의 '나', 교회에서의 '나', 혹은 여타 관여된 공동체 속에서의 나를 보시고, 그 속에서 내가 함께 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충실하였을 때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랑은 퍼져 가는 사랑이고, 개인적이면서도 연대적인 사랑이라고 묵상해 봅니다.

그래서 오늘 다짐해 봅니다. 역사를 바꿀만한 큰 힘은 내게 없어도 까치발을 들을 정도의 힘은 있지 않나 하고 말입니다. 작은 엑스트라의 힘을 더 쓰는 것이고, 누군가를 위한 작은 보탬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열정이 있습니다. 누구나가 다 이 정도는 마음만 먹기만 하면 할 수 있습니다. 그 까치발 정도만큼 입니다. 누가 압니까? 우리가 만들 그 까치발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또 생명을 얻을지 말입니다.

글쓴이: 박성준 목사, 달라스임마누엘연합감리교회 TX
올린날: 2013년 4월 26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

United Methodist Communications is an agency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2024 United Methodist Communication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