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아십니다!

어린 아들이 장작을 패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다 패놓은 장작을 집어 들더니 아들을 불렀습니다. "얘야, 이 장작을 부엌으로 날라야겠는데 좀 도와주지 않겠니?" "예, 그러지요." 아이는 두 팔을 벌리고 아버지가 놓아주는 장작을 한 아름 안고 부엌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동네 어른이 안쓰럽게 바라보곤 묻었습니다. "조그만 체구에 너무 많이 들고 가는 것 같구나. 무겁지 않니? 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아?" 아이가 대답합니다. "아니요. 내가 얼마나 들 수 있는지 아버지가 잘 아시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내 약함도, 내 능력도 다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거나 연단하실 때 우리가 감당할 정도로 하십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장작을 한 아름 들려줄 때, 아들을 힘들게 하려고 그렇게 한 것일까요? 아들이 건강하여 가정 일을 돕고 자신의 일도 처리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한 아름 시련을 주실 때, 단지 우리를 힘들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을 영적으로 든든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여호수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십 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말 감당하기 힘든 명령을 내리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돌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시 할례를 베풀어라." 그래서 여호수아는 돌칼을 만들어 기브앗 하아라롯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수5:2,3). 아시다시피 남자들이 할례를 받게 되면 통증이 심해 한동안 움직일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식적으로 볼 때, 적지에 들어와 할례를 행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수5:4)가 할례를 받는다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적에게 몰살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들의 사정을 모르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잘 아십니다. 그러면 왜 이런 무모한 명령을 하신 것일까요?

모임이나 축하연에서 사람들은 축배를 드는데, 대게 잔을 들고 '위하여'하고 외치며 잔을 부닥칩니다. 그런데 요즈음 중년 모임에서는 '위하여' 대신 '이대로'하고 축배를 드는 경우가 많아졌답니다. 돈도 벌고 살만큼 여유도 생겼는데 건강이 따라주지를 않습니다. 자꾸 늙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발 이대로'하는 마음으로 축배를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대로'를 외쳐도 우리의 육체는 이대로일 수 없습니다. 후패해지고 맙니다. 그러다가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이대로만 외칠 뿐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입성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되지 않았는가!'하고 자축하며 '이대로' 머무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대로' 머물다간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이 땅이 아니라 그들의 피가 흐르는 무덤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대로'를 외치는 것을 그치고 '미래로'를 외치며 나갈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미래를 위해 할례 시행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 안에 머물겠다는 결단과 주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행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면 누가 이길까? 초등학교 교과서의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북이가 이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대답은 '어느 쪽이 이길 지 알 수 없다'입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일이 현실화되어 둘이 경주를 한다면, 토끼가 반드시 이길까? 꼭 그렇진 않습니다. 어디서 경주를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수영의 펠프스와 육상의 볼트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트랙에서 번개처럼 달리는 볼트지만, 물 속에서 펠프스를 이낄 수 있을까요? 반대로 물에서는 돌고래처럼 빠르게 유영을 하는 펠프스지만, 트랙에서는 거북이가 따로 없을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단과 성도가 겨루면 누가 이길까? 성도가 사단과 어디서 겨루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른 것입니다. 주 안에서 겨루면 이기지만, 자신의 힘/지혜로만 겨루면 백전백패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지키라 하신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감당하기 도무지 어려운 일을 맡겨서 힘들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시인 나태주의 '풀꽃' 전문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세상에는 외모가 특출 나서 누구나 한 눈에 '예쁘다' '아름답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세히 보고 오래 두고 보아야 예쁜 구석이 보이고 사랑스러운 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오래 두고 보셨고, 가나안에서 할례를 명하시고는 자세히 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하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존재로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글쓴이: 이철구 목사, 남부플로리다한인연합감리교회 FL
올린날: 2013년 9월 20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

사회적 관심
동오하이오 연회와 서오하이오 연회를 이끄는 정희수 감독. 사진, 필자 제공.

교회는 모든 사람의 성소(sanctuary)가 되어야

정희수 감독은 교회가 이주민, 서류 미비 가정, 취약 계층, 그리고 모든 소외된 이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고 사랑이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가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개체교회
덴마크 화가 Carl Bloch가 1877년에 그린 산상수훈 (Sermon on the Mount). 출처,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우리가 전해야 할 설교는? 그리고 마리안 에드거 버드 감독의 설교

현혜원 목사는 “이스라엘만 사랑하고 이방인은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인 걸까요? 아니면 이방인들, 잊힌 자들,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고 부르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인가요?”라고 묻고, 합당한 삶으로 설교하라고 초대한다.
개체교회
레오폴드는 "대지의 모든 구성원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라는 철학적 입장을 통해 자연 보존의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였다. 그래픽 출처, 수재모 “레오폴드의 대지윤리” 통합적 접근 네이버 블로그.

생태계 보전(保全)을 위하여

오정선 목사는 서구의 정신과 동아시아 유교의 윤리적이고 영적 차원을 상호 존중하는, 그리고 상호 보완을 하는 대화를 통해 생태계 보전(保全)과 생태계 위기를 지구공동체가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 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United Methodist Communications is an agency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2025 United Methodist Communication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