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 에스라서에 보시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너진 성전의 재건을 위해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처럼 70년을 포로생활 하다가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백성들은 곧 성전 건축을 위해 일을 시작했습니다.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에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주는 지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스3: 10-11)라고 축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성전건축의 기초를 놓은 날은 기쁜 날이요 새로운 날이었습니다. 감격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에서 크게 슬퍼하며 우는 사람들도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다"(12절)고 했습니다. 이 노인들은 왜 울었을까요? 무너지기 전의 첫 성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지으려는 성전은 그 크기나 규모에 있어서 처음 성전과 비교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지어지려는 성전을 옛 성전의 위용과 비교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 성전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며 감격하고 기뻐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12-13)고 했습니다. 통곡의 소리가 기쁨의 환호성에 묻혀버렸습니다. 기쁨에 찬 환호 때문에 그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희비의 감정에는 저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인생에 이러한 감정이 동시에 드는 일들도 많습니다. 가정이나 교회, 우리의 마음에도 이 두 가지 마음과 감정이 생겼다가 사라지곤 합니다. 항상 기뻐하며 환호할 수만은 없는 게 인생 아닐까요? 그렇다면 슬픔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울다가 웃을 수 있을까요?
임마누엘! 부활의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슬픔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슬픔의 때에라도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4: 13절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소망 없는 사람처럼 슬퍼하지는 맙시다. 울더라도 예수 안에서 소망의 바위 위에 앉아 슬퍼하십시오. 슬픔이 삶을 주장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옛 영화를 그리워하며 큰 소리로 울었지만 더 큰 환호와 기쁨의 함성에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더 큰 기쁨의 조건들을 발견하며 다시 웃읍시다. 바울이 항상 기쁘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슬퍼할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기뻐해야 할 이유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글쓴이: 윤동현 목사, 그린교회 CA
올린날: 2012년 9월 13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